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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9 퍼온 글 <24 시간 안에 80쪽 보고서를 만들다>
2010/01/19 12:18 ETC.

<24 시간 안에 80쪽 보고서를 만들다>




지금 나는 대학에서 3학년 필수과목과 대학원 전공과목을 가르친다. 3 학년에 진입하는 학생들은 대학교 1, 2학년 교양 과정에서 전공학과와 별 연관을 맺지 못하고 지내왔다. 3학년 1학기가 실질적으로는 전공학과에서 배우는 첫 학기인 셈이다.

나는 지난 34년간 인간공학을 가르쳐 왔다. 전공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장 역점을 두어 가르치는 것은 공부하는 방법과 문제를 푸는 방법, 그리고 말하기, 쓰기이다. 교양 과정을 지내며 해이해진 학생들을 긴장시키기 위한 강의 방법도 동원한다.

학생들을 긴장시키는 방법을 말하겠다. 매월 말이 되면 지난 한달간 배운 내용을 토대로 중간시험을 친다. 학기말이 되면 기말 시험을 치고 중간시험과 기말시험 사이에 예고 없이 시험 문제를 나눠주고 10분간 치는 퀴즈를 매 학기 13-15회 실시한다.

퀴즈와 중간시험 모두 책과 공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허락한다. 퀴즈는 빨리 써야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책과 공책을 마음대로 보아도 좋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한두 번 시험을 치르고 나면 학생들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책과 공책에서는 시험 문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수시로 질문한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좌우로 혹은 근처에 있는 학생 모두에게 물어 본다.

재수가 없는 학생은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지적당하고 곤혹스러운 경우를 당하는 수도 있다. 지난 시간에 앞줄에 않았다가 질문을 자주 받았던 학생들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긴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왜 자리를 옮겼냐고 쫒아다니며 질문한다. 학생들은 포기하고 매시간 같은 자리에 앉는다.

학생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태도를 보면 매우 답답해 보인다. 학생들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있다. 5지선다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답을 몇 개 예시해야 그 중에 고르지 않겠느냐는 표정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묻거나 본인의 의견을 물어 보면 더욱 당황한다. 어렸을 때부터 말하기 훈련을 받지 않은 학생들이다.

글쓰기도 훈련을 반복한다. 시험 문제에서 요구하는 답안은 써야 할 양이 많기 때문에 학생들은 글씨를 빨리 써야 한다. 글쓰기에 지친 학생들이 OX 문제 시험을 한번 치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학생들의 소원대로 OX 시험 문제를 만들어 시험을 쳤다.

그러나 형식이 약간 다르다. OX로 우선 답을 쓰고, 그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것이다. 설명이 그럴듯하면 OX가 틀려도 만점을 주고, 설명이 시원치 않으면 답이 맞아도 점수를 안 준다. 학생들은 차리리 설명하는 시험이 낫다고 했다.

기말시험은 좀더 착잡하다. 오전 9시에 편지 형식으로 된 시험 문제를 나눠 주고 그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24시간 동안 80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해 오라고 요구한다. 편지는 인간공학과 관련된 문제의 해결 방법을 나에게 물어 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공학적 제품설계 방안이 궁금한 기업체 사장, 한국의 산업 발전 현황을 꿰뚫고 싶은 해외 기업인, 기술 분쟁의 소송을 의뢰받은 국제변호사, 신제품 특허를 준비하는 변리사, 발명경진 대회에 아이디어를 출품하고 싶은 고등학생 등이 나에게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려 달라고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학생들은 9시에 시험 문제를 받은 후 낮 12시까지 무엇을 묻는 문제인가를 구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오전 6시까지는 도서관, 인터넷, 실험실에서 관련된 전문 자료를 수집하고 복사해 놓는다.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서 내용을 구상하고 무슨 내용을 적을 것인가를 기획한다. 밤 12시부터 컴퓨터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해서 8시까지 쓰라고 한다. 80쪽 보고서에 사용할 글자의 크기와 줄 간격까지 지정해 준다.

채점 방식도 미리 알려준다. 80쪽에서 한 쪽 모자랄 때마다 1점씩 감점한다. 지난 25년간 매년 이런 방식으로 기말시험을 쳐 오고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1명도 포기하거나 제출하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 간혹 못 써낼 것 같으면 미리 수강을 취소한다. 그러나 필수과목 아닌가? 내년에는 꼭 써내야 한다.



<세계 학술대회에서 받은 10개의 최우수 논문상>



약 10여 년 전에 대기업 임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임원은 나에게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주어 든든하다고 했다. 그가 만족했던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최근에 중요한 해외 고객으로부터 급한 자료를 조사해서 보고서로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중요한 고객이어서 부탁을 받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4-5일 여유가 있었는데 약 50쪽짜리 보고서를 잘 써서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련 부장, 과장과 신입 사원을 불러 보고서 작성에 관한 지침을 설명했다. 부장과 과장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유독 신입 사원은 별 걱정이 없는 듯 보였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신입 사원을 따로 불러 주의를 주었다. "선배사원들이 다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보고서 작성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신입 사원이 반응의 뜻밖이었다.

"4-5일 후에 50쪽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하루 만에 80쪽 보고서를 써낸 적도 있으니까요." 임원은 궁금하여 자세히 물었다고 했다. 그 신입 사원은 기말시험 얘기를 애 주었다고 했다.

하루 만에 80쪽짜리 보고서를 써냈다고 하면 모두들 의심한다. 내용도 별것이 없을 거라고 얘기한다. 나도 이에 공감한다. 그러나 별 내용은 없을지라도 자기의 생각을 80쪽 분량으로 하루 만에 표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쉬지 않고 80Km를 행군해 본 사람은 중도에 몇 번 쉬면서 50Km을 행군하라고 하면 웃음부터 나올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상대방에게 신뢰를 준다.

내가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글쓰기의 성취감이다.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은 기업체에서 환영을 받고 해외 유학 과정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1987년 국제 인간공학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국제 인간공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92년에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역시 국제 인간공학회로부터 내 학생이 최우수 논문발표상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내가 가르친 인간공학 실험실 출신의 유학생들은 1987년부터 1999년까지 13년간 10개의 최우수 논문상을 휩쓸었다.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서도 최우수 학생 논문상 10연패 기록은 힘들 것이다. 올림픽으로 치면 우리 양궁이나 태권도 팀쯤 되는 기록이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국제 학술대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학생들이 우수했기 때문에 최우수 논문상을 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3학년 1학기 때 80쪽 보고서를 쓰면서 배운 경험도 일조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우수한 박사과정 논문 중에서 13년간 10개최우수 논문상을 받은 학생들이 같은 실험실 출신이라면 이는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안 그런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부모님들이 확신을 갖고 자녀들의 글쓰기 훈련에 직접 나서 달라는 것이다. 자녀들의 글쓰기 훈련이 당장 큰 효과를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확신을 갖고 계속한다면 전 세계의 각종 발표 대회에서 대단히 실력을 보일 것이다. 증거가 있지 않은가?
이면우, <생존의 W 이론>(랜덤하우스중앙, 2004), pp. 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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